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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저희 팀 과장님이 스마트폰 환전 앱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화면을 끄시는 걸 봤습니다. "달러 결제, 이번 달도 좀 미뤄볼까 하는데"라는 혼잣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수출은 사상 최대 수준을 찍고 코스피는 올해 처음으로 9,000선을 돌파했는데, 원달러 환율은 왜 1,500원 안팎에서 널뛰기만 반복하고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걸까요? 한국은행이 두 달 남짓 사이에 환율 관련 BOK 이슈노트를 연달아 두 개나 낸 걸 보면, 이게 단순한 단기 수급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연금 리밸런싱, 정말 환율을 올렸을까?

솔직히 처음 이 논란을 접했을 때는 고개가 갸웃해졌습니다. 바클레이즈가 낸 리포트는 국민연금이 리밸런싱을 유예하면서 코스피가 과도하게 올랐고, 그 여파로 외국인들이 대규모 차익 실현 매도에 나섰다는 논리였습니다. 여기서 리밸런싱(Rebalancing)이란 목표 자산 비중이 흐트러졌을 때 이를 원래 비율로 되돌리기 위해 일부 자산을 사고파는 행위를 말합니다.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 목표 비중을 20.8%까지 높이면서 정상적인 매도 타이밍을 늦춘 게 문제였다는 주장이었죠.

이 논리에서 걸리는 부분은 딱 하나였습니다. 그럼 외국인 이탈이 무서워서 코스피 상승 자체를 막아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보건복지부는 "과도한 가정과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분석한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공식 반박한 바 있습니다. 바클레이즈 분석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리밸런싱을 유예한 결과 2026년 5월 말 기준 국내주식 수익률이 약 22%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만약 기존 원칙대로 리밸런싱을 계속했다면 수익률은 11.1%에 그쳤을 것으로 봤습니다. 여기에 국회예산정책처가 최근 국민연금 기금운용 실적 개선을 반영해 기금 소진 시점을 기존 전망(2065년)보다 4년 늦춘 2069년으로 수정 전망한 것도 눈에 띄었습니다. 향후 장기 평균 운용수익률이 1%포인트 더 높아진다면 소진 시점이 2082년까지 늦춰질 수 있다는 전망도 함께 제시됐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장기 평균 수익률 가정에 따른 시나리오라 실제로 그만큼 늦춰질지는 지켜볼 문제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습니다.

물론 외국인의 대규모 순매도가 달러 수요를 키운 건 사실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원인을 국민연금 탓으로만 돌리기엔 논리적 비약이 있고, 구조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어 보였습니다.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국민연금 리밸런싱 유예 → 코스피 상승 → 외국인 차익 실현 매도 → 달러 수요 증가라는 인과 사슬은 다소 단선적인 해석일 수 있습니다.
  • 외국인 순매도는 역대급 규모였지만, 이는 리밸런싱 유예 이전부터 진행되던 구조적 흐름의 연장선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매도는 원화 간 거래라 환율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 반면, 외국인 매도는 원화를 달러로 환전하는 과정이 수반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 참고로 국민연금의 리밸런싱 유예는 2026년 6월 30일로 종료되고, 7월 1일부터 매도 물량이 장기간에 걸쳐 분산 집행되는 방식으로 재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약: 국민연금 리밸런싱 논란은 외국인 매도와 환율 상승의 일부 원인을 설명할 수 있지만, 구조적 배경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단편적 해석이라는 반론도 타당해 보입니다.

대외자산 확대, 한국도 일본 닮아가고 있나?

제 퇴직연금과 연금저축펀드 잔고를 확인하다가 작년에 미국 지수 ETF 비중을 꽤 올려뒀다는 걸 새삼 확인했습니다. 화면 속 파란 상승 그래프를 보면서 별생각 없이 "미국이 수익률이 좋으니까"라는 이유로 눌렀던 매수 버튼들이었는데, 한국은행 BOK 이슈노트를 읽고 나서야 그게 훨씬 큰 흐름의 일부였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2020년 이후 우리나라 가계는 해외 금융자산, 특히 미국 주식에 자금을 빠르게 투입해 왔습니다. 관련 통계를 보면 대외금융자산 중 해외증권 투자 비중이 40%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채권·부동산 위주로 분산 투자하는 다른 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모습으로 보입니다(출처: 한국은행 BOK 이슈노트 게시판).

여기서 경상수지(Current Account)란 상품·서비스 수출입과 투자 소득 등을 모두 포함한 대외 거래의 종합 성적표입니다. 과거에는 경상수지 흑자 폭이 커지면 달러가 국내로 유입돼 원화가 강세를 보이는 패턴이 뚜렷했습니다. 그런데 2023년 2분기 이후 이 공식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흑자가 늘어나는데도 실질환율은 오히려 오르는 움직임이 상당 기간 이어졌다는 것이 한국은행의 분석입니다. 한국은행은 그 원인으로 민간 부문의 대외 금융자산 축적, 즉 개인과 기업 모두가 해외 투자를 늘리면서 달러를 국내로 들여오지 않는 구조적 변화를 지목했습니다.

기업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해외에서 번 수익을 국내로 송금하거나 배당하는 대신 현지에 유보하거나 재투자하는 비중이, 2010년 이후 평균 기준으로 한국은 약 40%, 일본은 약 46%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독일은 28%, 대만은 18%에 그쳐 상대적으로 해외 수익 환류가 활발한 편이었습니다. 대만은 해외 기업의 자국 복귀 투자를 유도하는 정책 등을 통해 이런 환류 구조를 만든 것으로 분석됩니다. 아버지가 예전에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와서 쇼핑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일본 가서 물가 싸다고 좋아하지 않냐"고 하셨을 때는 그냥 엔저 얘기려니 하고 흘려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순대외자산국 전환 이후 일본이 걸었던 경로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순대외자산국(Net External Creditor)이란 해외에 투자한 자산이 외국으로부터 빌린 부채보다 많은 국가를 의미합니다. 한국은 2014년 3분기 순대외채무국에서 순대외자산국으로 전환됐고, 지난해 말 기준 순대외금융자산은 GDP 대비 약 48% 수준까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일본이 1996년 무렵 기록했던 순대외금융자산 규모와 GDP 대비 비율(약 48%)과 비슷한 수준이라, 한국은행은 이 경로가 1980년대 이후 일본이 순대외자산국으로 자리 잡아 가던 흐름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출처: 한국은행 BOK 이슈노트 게시판). 요점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2020년 이후 가계의 해외 주식 투자 급증 → 달러 유출 구조 형성 가능성
  • 기업의 해외 현지 유보·재투자 비중 한국 약 40%, 일본 약 46% → 수출로 번 달러가 국내로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 경향
  •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현지 투자 압박 → 기업의 달러 국내 환류 유인 추가 감소 가능성
  • 대만·독일과의 차이: 재투자 비중이 각각 18%, 28%로 낮아 상대적으로 달러 국내 유입이 원활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약: 한국의 고환율 흐름은 단기 수급 문제라기보다, 개인과 기업 모두 해외 자산 투자를 늘리면서 달러가 국내로 충분히 돌아오지 않는 구조적 전환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국내 투자 매력을 높이는 것 외에 답이 있을까?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을 보면서 솔직히 든 생각은 "과연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였습니다. 기재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 등 이른바 F4가 모여 "과도한 변동성과 일방향 쏠림 현상은 용인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수출 기업들에게는 수출 대금 즉시 환전과 해외 유보 자금의 국내 유입 확대를 요청했습니다.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은 10여 년 만에 주요 외국환은행을 대상으로 외환 공동검사에 나섰고, 불법 외환거래 대응반도 상시 운영에 들어갔습니다. 조치들이 촘촘하게 나열되긴 했지만, 각각의 정책이 실제로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팀 과장님이 달러 결제를 미루는 건 불법도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그런데 이런 판단이 기업과 기관 단위로 쌓이면 외환시장 수급에 실질적인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걸 이번에 다시 확인했습니다. 투자 소득(Investment Income)이란 해외 자산에서 발생하는 배당, 이자, 수익 등을 총칭하는데,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이 소득이 해외 현지에 유보되거나 재투자될 경우 통계상 투자소득은 늘어나도 실제 국내 외환시장 유입 규모는 그만큼 늘지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결국 구조적인 해법은 국내 자본의 수익성을 높여서 기업과 개인의 돈이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향하도록 만드는 방향일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다행히 코스피 9,000 돌파 이후 서학개미 자금 일부가 국내 증시로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도 포착되고 있습니다. 제 연금저축펀드에서도 국내 비중을 다시 늘려볼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입니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고 기업들의 국내 재투자가 살아난다면, 환율은 당국의 선언이 아니라 시장 수급을 통해 서서히 안정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단기 처방보다는 그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내 투자 매력도를 높이자"는 결론이 너무 당연하게 들린다면, 그건 역설적으로 그게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과제이기 때문일 겁니다.

수출이 잘되고 코스피가 뛰는데도 환율이 쉽게 내려오지 않는 현상, 처음엔 단순한 시장 이상 징후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들여다볼수록 이건 한국이 선진국형 순대외자산국으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에서 겪는 구조적 통과의례에 가까워 보입니다. 일본이 앞서 걸었던 경로와 겹치는 지점이 있는 만큼,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환율 흐름을 그냥 뉴스로만 흘려보내지 말고, 내 자산 배분 전략을 한 번쯤 재점검해보는 계기로 삼는 것도 실용적인 접근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piTt9ttMPlQ&list=PLFFs3piXvo8s&index=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