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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학원비가 곧 자녀에 대한 투자라고 믿었습니다. 겨울이면 학원 차량을 기다리던 정류장의 찬바람, 아버지가 월급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학원비 봉투를 챙기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허리띠 졸라매며 보내줬던 학원들이 지금의 저에게 어떤 자산을 남겼는지 돌아봤을 때, 선뜻 답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사교육에 쏟아붓는 돈이 정말 최선의 선택이었을지, 아니면 그 돈을 다른 방식으로 굴렸다면 어땠을지 하는 질문을 요즘 계속 하게 됩니다.
부모의 믿음과 실제 결과 사이의 간극
일반적으로 사교육에 많이 투자할수록 아이의 미래가 안전해진다고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꽤 단순화된 믿음일 수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국어, 영어, 수학 학원을 돌리셨어요. 안 쓰고 안 입으면서까지 마련한 돈이었는데, 지금 와서 그 시간과 돈이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 솔직히 명확하게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흥미로운 건, 당시 부모님들이 그 선택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변이 다 그렇게 하니까, 그게 당연히 옳은 길이라고 느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른바 정보 비대칭 상태, 즉 금융이나 투자에 대한 개념 자체를 교육받은 적이 없다 보니 비교할 기준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가데이터처와 교육부가 공동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5년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약 27조 5천억 원으로 전년(29조 2천억 원) 대비 5.7% 감소했습니다. 다만 이는 2022년 이후 처음 있는 감소세로, 그 직전인 2024년까지는 4년 연속 사상 최고치를 경신해온 흐름이었습니다(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 2025년 초중고 사교육비조사 결과). 가구당 사교육비 지출 규모가 이렇게 큰 폭으로 오르내리는 동안, 정작 그 지출이 장기적으로 어떤 수익률을 만들어 내는지 따져본 가정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그런 가정 중 하나였고요.
- 사교육비 총액은 해마다 증감을 반복하지만, 그 효과에 대한 정량적 검증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임
- 부모 세대 자체가 금융 교육을 받은 경험이 적어 비교 기준이 부재했을 가능성이 있음
- 주변을 따라가는 결정이 최선처럼 느껴지는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해온 것으로 보임
생존자편향이 만들어낸 '15억 신화'
사교육을 끊고 그 돈으로 ETF에 투자하면 아이가 30살이 됐을 때 15억이 된다는 식의 주장을 들으면, 처음엔 꽤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습니다. 저도 처음 접했을 때 숫자가 워낙 구체적이라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전형적인 생존자 편향(Survivorship Bias)의 구조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이 개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통계학자 에이브러햄 왈드(Abraham Wald)가 귀환한 전투기의 총탄 자국만 보고 장갑을 보강하려던 군의 계획을 뒤집은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왈드는 정작 격추당해 돌아오지 못한 기체의 손상 부위를 봐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성공한 사례만 눈에 띄게 부각되고 실패한 사례는 조용히 사라지는 현상이 판단을 왜곡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실제로 제가 겪은 일인데, 지인이 강하게 추천하는 종목에 뒤늦게 올라탔다가 물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지인은 자기가 수익 낸 종목 얘기만 했지, 손실 본 종목 이야기는 꺼내지 않더군요. 성공 사례만 나열하는 방식은 투자 추천이든 교육 방식이든 구조가 비슷하게 반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후기가 쏟아진다'는 식의 나열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결과가 좋았던 사람은 먼저 연락하고 싶어지지만, 결과가 나빴던 사람은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복리 효과(Compound Interest)가 실제로 강력한 힘을 가진 건 맞습니다. 복리 효과란 원금에 이자가 붙고, 그 이자에 다시 이자가 붙는 방식으로 시간이 길수록 자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원리를 말합니다. 다만 이 계산이 성립하려면 20년 이상 지속적으로 불입하고 시장이 장기적으로 우상향한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그 전제가 얼마나 불확실한지는 잘 언급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금융소비자보호재단(옛 한국금융투자자보호재단)이 실시해온 금융역량 조사는 OECD/INFE 기준과 방법론을 참고해 국민의 금융 행동·심리·지식 수준을 살펴보는 자료입니다(출처: 한국금융소비자보호재단 - 금융역량 조사). 금융 지식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극단적인 수익률 숫자를 접하면, 비판적으로 따져보기보다 그대로 받아들이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금융교육의 필요성, 그런데 방식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돈의 흐름을 이해하고, 자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데는 저도 공감합니다. 금융교육이란 단순히 주식 종목을 고르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돈을 어떻게 벌고 불리고 지키는지에 대한 사고방식을 키우는 교육을 말합니다. 이 부분은 제 경험상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영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교육 다 끊고 그 돈 전부 ETF에 넣어라"는 식의 이분법적 처방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ETF(Exchange Traded Fund)란 주식처럼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펀드로, 특정 지수나 자산군을 추종하도록 설계된 분산 투자 상품입니다. 장기 분산 투자에 적합한 수단인 건 사실이지만, 이걸 적립하는 동안 아이의 기초 학습 환경을 어떻게 유지할지, 가정 소득이 불안정할 때는 어떻게 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논의가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인 교육이나 미국 퇴직연금 제도를 예로 드는 방식도 제 입장에서는 다소 성급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미국의 401(k), 즉 확정기여형 퇴직연금 제도는 수십 년에 걸쳐 세금 혜택과 시장 구조가 맞물리며 정착된 시스템입니다. 확정기여형이란 근로자가 직접 적립액과 운용 방식을 결정하는 구조로, 운용 결과에 따라 퇴직금이 달라지는 방식입니다. 한국의 사회 구조나 주식시장 역사와는 맥락이 다를 수 있는데, 그 결과만 떼어와서 "이렇게 하면 된다"고 단정하는 건 지나치게 단순화된 논리로 보일 수 있습니다.
- 금융교육 자체의 필요성은 분명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임
- 다만 사교육 전면 중단이라는 처방은 가정마다 상황이 다르므로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움
- 해외 사례는 참고할 수는 있지만 한국의 제도·문화와의 차이를 반드시 감안할 필요가 있음
불안을 자극하는 콘텐츠 앞에서 멈추는 법
이런 류의 콘텐츠가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내용이 좋아서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구조 자체가 불안을 먼저 키우고, 그 불안의 출구로 자신의 처방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안 바꾸면 뒤처진다"는 우려를 먼저 심어두고, "이렇게 하면 된다"는 확신으로 마무리하는 패턴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을 꽤 봤는데, 처음엔 카리스마 있어 보였지만 결국 디테일이 빠진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감정에 호소해 결단을 재촉하는 화법은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 Bias)을 자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손실 회피 편향이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아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가 제시한 개념으로,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손실을 훨씬 크게 느끼는 심리를 말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합리적 판단보다 감정적 결정을 내리기 쉬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콘텐츠 전체를 틀렸다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사교육에 과도하게 지출하는 것, 아이에게 금전 감각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 학벌만이 성공의 기준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 것, 이런 문제들은 저도 현실에서 충분히 느끼는 부분입니다. 다만 그 문제의식이 타당하다고 해서 처방까지 전부 옳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제 진단과 해결책은 별개로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결국 저는 이런 콘텐츠를 볼 때마다 "이 사람이 제시하는 숫자의 전제 조건이 무엇인가", "실패한 사례는 왜 보이지 않는가", "내 가정 상황에 그대로 적용 가능한가"를 먼저 묻게 됩니다. 확신에 차 있을수록, 한 번 더 의심해보는 것이 제 나름의 검증 방식입니다.
정리하면, 사교육 과잉과 금융 문맹이라는 문제의식 자체는 쉽게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부모님이 학원비로 쓰신 돈의 일부가 다른 형태로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생각이 곧바로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극단적인 숫자와 성공 사례만으로 채워진 주장은, 공감이 가는 부분만 걸러서 참고하고 처방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따로 검토하는 편이 안전해 보입니다.
자녀에게 돈의 개념을 가르치고, 작은 금액이라도 복리로 적립해나가는 습관을 만들어주는 것, 이 방향 자체는 충분히 시도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사교육을 무조건 끊는 것과 같은 뜻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한 발 물러서서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